엊그제 일을 끝내고 서점에 잠시 들렀습니다. 집에 가는 길목이라 자주 가는 서점이 Madison Square Garden에 있는 미국의 서점 체인, Borders지요. 그날 저녁 마침 뉴욕 닉스의 경기가 있었는지 길에 티켓을 파는 암표상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아주 많고 붐비더군요.
인파를 뚫고 겨우 서점 안에 들어가 잠시 벽에 몸을 기대고 집어온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조금씩 좋지 않은 냄새가 풍기더군요. 주변을 둘러보니 옆 칸에 왠 흑인 아저씨가 책을 몇권 쌓아두고 읽는데 한눈에 노숙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노숙자들이 서점에서 쉬는 것은 자주 보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나직하게 이번에는 나직하게 기합을 넣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책장 틈새로 슬그머니 훔쳐보았더니 그 아저씨가 자리에 앉은채 상채를 이용해서 책을 보면서 무술동작을 익히고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예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시절 조금 배웠고 무협영화를 좋아하기에 한눈에 그가 매우 절도 있는 동작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관절의 움직임이 힘있고 격한 것이 이소룡의 절권도가 아닌가 했습니다만 아무튼 무척 흥미로운 광경이었지요. 그리고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눈빛과 인상이 도무지 노숙자라고 보이지 않을만큼 반짝이고 평온해 보였다는 겁니다.
미국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보고 듣고 나누면서 흥미로운 것들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삶을 매우 느긋하고 여유있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하루 하루 열심히 살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었던 전후 세대 부모님과 당연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셨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를 보면서 자랐고, IMF를 격으면서 경제적인 위기는 어떻게든 피하려는 제 멘탈리티로는 좀처럼 따라잡기 힘든, 근거를 알수 없는 여유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뉴욕시에서조차 이렇게 한가로이 서점에서 무예공부를 즐기는 노숙자를 만날 수 있으니 말 다 했지요.
미국이라는 나라를 칭송하려는 것도 아니고 노숙자를 칭송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서점의 그 노숙자의 눈에서 엿볼 수 있었던 행복감을 과연 저도 만끽하면서 하루를 살아가는지 의문이 들더군요. 다 놓아버리고 거리의 구도자가 될 생각은 전혀 없지만 행복하게 즐겨야 할 삶을 너무 많은 것을 손에 쥐고서 끙끙거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밥 세끼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집,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생계를 유지할 수입원도 있지만 불필요한 걱정이나 불안감에 가득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거지 아저씨 서점에서 무술 연습 하는걸 보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네요. 역시 사는게 녹녹치는 않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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