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3년 동안 반복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밑천이 털렸다는 느낌이다.
10년 전, 나한테는 남들한테 없는 특별한 지식과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회사에서 처음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때 나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 회사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치를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회사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팀 내의 누구보다도 먼저 일을 끝내고 지속적인 성과를 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 내 업무 분야에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은 아주 높지만, 그 이외에는 모르는게 너무 많아진 것 같다. 가난하고 젊은 이민자였던 나에게 중요한 것, 나의 밑천은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지식과 행동력이었는데, 이렇게 실직을 하고 보니 그 밑천이 1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아놓은 저축이나 투자는 식솔들을 먹여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결국 직장을 찾아 들어가는 것 말고는 먹고 살 길은 막연한 것이다.
지난 10년의 직장 생활은 나에게 너무 큰 평안함을 주었던 것 같다. 가족이나 지인들의 도움 없이 아이들 셋을 키우느라 어쩔수 없기도 했지만, 나는 직장에서 살아남는데만 목표를 두고 자기개발을 해왔다. 조직에서 나의 자리에 위기가 찾아왔을때는 살아남기 위해서 잠을 안자면서 책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보통은 업무 후에 남은 시간과 에너지는 아내와 함께 육아와 가사를 하는데만 썼다. 아마 많은 맞벌이 부부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내 밑천이 바닥나는 것도 모르고 오늘까지 온 것 같다.
열심히 직장을 찾고 있지만 그러면서 밑천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면 아이들이 조금 더 크기 전에는 하루에 한시간 이상 투자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안다. 공부와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나는 글을 많이 썼다. 그 중 대부분은 블로그들에 올리는 포스팅이었지만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고 글을 쓰는데 시간도 많이 썼다. 워낙 미천할 때라 내공이 상승하는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스타트업들에서 일하느라 미친듯이 공부하고 적용하기를 반복했다. 스타트업 특성상 목표는 분명한데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니 공부하고 실행하기를 무한반복하면서 넓어도 제법 깊이 있는 지식을 체득했다. 게다가 사업 파트너셨던 형님들의 내공이 엄청나서 대화하는 것만으로 배움이 컸다. (사실 그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갑자기 뒷통수를 치며 깨닫음으로 오는 보석 같은 기억들이 많다.)
미국 회사들에서 했던 10년의 직장 생활은 나름대로 많은 공부를 하게 했지만 그것들은 나 스스로의 개발 보다는 주어진 테스크들을 완수하거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보와 수단의 습득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회사 생활을 하고 한 분야에서 성장/성공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들이지만 회사 밖에서는 이것들이 나에게 월급을 주거나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이 되지를 않는다.
밑천이 없으면 사는게 힘들다. 그래서 밑천이 바닥나지 않게 잘 간수하면서 그 위에 무엇이든 쌓아올려야 한다. 예전 같으면 생각만으로도 행복했을 부유함을 지난 십여년 동안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을 잃고 보니 나는 아직도 밑천이 부족하고 내가 이룬 것들도 모래성처럼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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