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열심히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필이 혹은 볼펜이 종이에 착~ 달라붙어서 제 아무리 악필이라도 쓰는 글자마다 아름답게 보이고 또한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고 크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공부가 참 잘된다. 펜을 쥔 손가락이 점점 아파오지만 그 느낌을 잊어버릴까봐 펜을 돌리지도 않는다. 정신 없이 줄을 긋고 써내려 가다 보면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리던 음악은 저 멀리로 날아가서 잔잔히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날아가버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시험공부 하다가 이런 날 있으면 그 다음날 시험은 대박이다.

마치 공책 세 장 정도 밑에 책받침을 깔아놓고 아침에 새로 깎아서 살짝 끝이 뭉툭해진 연필로 또박또박 빠르게 써내려 가는 느낌. 그 느낌을 어느 펜을 쓰더라도 어떤 종이에 쓰더라도 느끼게 되니 신기하기 짝이 없다 된다.

어릴 적 나는  집중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20분 이상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느낌이 펜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고교 시절엔 필통 안에 조그만 세계가 있었다. 한국, 독일, 일본, 미국 펜은 기본이고 캐나다, 스위스, 네덜란드, 대만, 오스트리아, 호주 펜까지 좀 써진다 하는 펜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대학 때 IMF 때문에 값비싼 펜들을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모나미 볼펜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제도용이었다. 그런데 때때로 그 100원짜리 펜도 연습장에 착~ 달라붙는 게 아닌가! 그때 나름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후로 적어도 공부할 때는 종이나 펜에 구애 받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종이는 그냥 복사기 옆에 버려진 종이들을 주워다 쓰고 펜은 똥만 많이 나오지 않으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썼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한동안 그 느낌을 잊고 살았다. 아마 펜보다는 키보드를 훨씬 더 많이 써서 그럴 것이다. 요즘 다시 학교에 가기 위해서 펜을 잡았다. 단어 외우고 문제 푸는데 키보드로 할 수는 없으니까 노란 연습장에 집에 있는 허름한 샤프를 들고는 쓰고 풀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지 한달 반 정도가 지났다. 요즘에 펜이 종이에 착~ 붙기 시작했다.

집중력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다들 여러 현상을 경험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펜으로 종이에 글을 써 내리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 된다. 집중력이 없는 상태에서 글자를 쓰면? 내가 쓰면서도 해독이 안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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