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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이 한국말을 한다! - 이민사회 세대간 차이와 남겨진 숙제

Y군! 2009. 3. 3. 04:01

며칠 전에 큰처남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저를 ‘형’ 이라고 부르면서 떠듬떠듬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는데 오랜만에 처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처남하고 한국말로 이야기를 한 것이 무슨 큰 사건인가 하겠지만 처남은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재미교포 2세입니다.

장모님께서 거의 네이티브 수준으로 영어를 하시고, 한국사람들이 많이 없는 곳에서 자라서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하지요.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국서 나고 자란 사람인 저를 만나면서, 그리고 한국 드라마에 빠져들면서 한국말이 일취월장한 케이스이죠.^^) 그런 처남은 어설프게 한국말을 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게다가 굉장히 미국적이라서 형, 누나 같은 호칭은 절대로 쓰지도 않고 듣기도 싫어하지요. 게다가 저보다 나이도 어린 처남이 꼬박꼬박 제 이름을 부르면서 친구 대하듯 할 때면 약간 괘씸하지만 미국사람에게 한국사람의 예의와 예절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냥 친구 먹어주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그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를 ‘형’ 이라고 부르면서 한국말을 시도한 겁니다!

“뭘 잘못 먹었냐, 왜 갑자기 한국말을 하고 사람을 놀래키냐?” 당황해 하며 물어봤더니 장인어른 환갑 선물로 한국말을 배우기로 했답니다. 평생 아버지와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처남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보니 아버지를 더 알고 싶고 대화를 하고 싶었나 봅니다. 참 기특하고 고맙더군요.
음… 기특하고 고맙기는 한데 들어주기가 약간 고역입니다. 26살의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덩치 큰, 게다가 목소리까지 낮고 굵직한 처남이 6살 수준의 한국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초등학생 수준까지 되는 것 같은데 말하기는 영락없는 유치원생입니다. 1인칭, 3인칭이 계속 헛갈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어를 배운 것이 높임말이어서 해요체 밖에 쓰지를 못하더군요. 그래도 생각보다 어휘가 좋아서 놀랐습니다.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전화로 한국어 강습을 해줄 생각입니다.

미국에서 한인 2세들을 보면 부모님들과 거의 소통을 안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기는커녕 의사소통조차 못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지난 번에 밥은 같이 먹어야 한다는 포스팅을 올렸는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라도 막아보자는 의지입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들이 처음 이민을 오게 되면 전문직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빠서 영어공부는 자꾸 뒷전으로 밀리고 자녀와 찬찬히 대화할 여유도 가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생활영어 수준의 의사소통을 아이들과 할 수 있게 되지만 그 이상의 대화는 어려울 때가 많지요. 한국말로도 어려운데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떠듬떠듬 말하면서 아이와 사춘기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힘이 들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정서조차 미국의 그것을 가지고 자라는 아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서 어렵게 미국으로 이민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정작 아이들과는 소통하고 교감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그러나 받아들여야 할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할 여러 가치들 중 하나로 여겨질 뿐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많은 2세들이 철이 들고 어른이 되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피는 정말 물보다 진합니다. 많은 한인 2세들이 같은 2세들과 모여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공통분모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부모님의 정서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처남처럼 늦게라도 부모님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한국을 방문해보려는 친구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겠지요.

스스로 한국사람임을 알면서도 부모님 세대를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생겨나는 오해들 때문에 부모님 세대 및 한인 이민 사회를 싫어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한국의 것들을 좋아하고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결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사람들이 한인 2세들입니다. 1세이면서도 2세들 사이에 살아가는 저는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을 여러 각도에서 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그런 저에게 개인적으로 남겨진 숙제가 참 큽니다. 앞으로 2세로 태어나 자라날 제 아이들에게 어떻게 제가 가진 정서를 나누어 줄 것이고, 또한 어떻게 그들이 가진 정서를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를 어떻게 놓치지 않을 것이고, 또 어떻게 대화를 나눌 것인지 등이 제가 풀어야 할 숙제들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제 스스로도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그런 문화와 정서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이민자로서의 제가 가지는 사명인 것 같습니다.

 

+ Sujae님 포스팅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서 트랙백 합니다.